대학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을 오르내린다. 언론이 주체가 되어 대학을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대학 출신이냐가 능력 판단의 중요하고도 절대적인 잣대가 된지 오래니 대학에 대한 정보는 언론에게도 매우 쓸 만한 것일 테다. 

 

  그러나 국립대학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어 그 돈줄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이나 실제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런 평가에 직접적으로 저촉된 이들에게 이런 평가들은 의외로 약발이 없거나 약하다. 모든 대학들의 등수가 매겨지는 이 평가가 왜 약발이 먹히지 않는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볼 것은 이 평가들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 곧 수험생에게 가지는 약발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부산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서울의 대학에 가는 이유는 대학의 브랜드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같은 경제 위기 때 가장 큰 이슈인 취업률보다도 훨씬 앞서는 순위다. 그런데 그 브랜드는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서울의 지리적 가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학의 입학성적과 대학 평가가 별 관련이 없는 핵심적인 이유다. 

 

  최근에 나온 한 대학평가는 그 평가책임자의 말을 빌어 “우리가 보기에 한국의 지방 국립대학들은 굉장히 평가 절하되어 있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라는 단서를 붙였다. 대학이 평가를 잘 받으려 하는 가장 큰 동기가 세간의 인식을 바꿔 우수한 학생들을 모으기 위함인데, 정작 한국의 평가는 이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한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리 평가를 잘 받으면 뭐 하나 차라리 서울에 분교를 만드는 게 낫지’라는 자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는 대학을 평가해 지원형태나 지원액을 결정하는 정책 당국이다. 정책 당국은 매우 민감하게 대학의 순위를 챙기고 대학의 업적을 독려하나 국립대학에 대한 지원수준이나 지원체계는 평가와는 별 관계가 없다. ‘학문의 균형 발전’은 국립대학의 존재 이유 중에서도 가장 큰 것에 속하는데, 정책 당국은 실현성도 낮고 스스로도 준비가 미흡하다고 자인하는 법인화에는 매달리면서도 사회의 풍조에 거슬리면서까지 힘겹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수한 평가도 받는 지방 국립대에 대해 매양 ‘비지떡’ 수준의 지원만을 반복한다. 요즘은 허드레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자기 학교의 색깔, 정체성을 찾는 시대다. 창고 건물이나 짓는 돈으로 대학의 상징인 도서관을 하라고 우겨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력만큼 평가받는 사람에게는 큰 고역이다. 이런 평가를 일 년에도 여러 번 받는다면, 그 평가에 어울리는 반대급부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 평가에는 이런 균형이 없다. 그저 평가만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평가를 받는 사람이든 이를 보는 사람이든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그 평가마저 나쁘게 나온다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좋은 평가가 꾸준히 축적된다면 종내에는 사람들의 인식도 바뀔 것이라고. 물론 그럴 것이다. 문제는 그 추세다. 지방의 국립대학이 요 모양이 된 이유는 1980년에 아무런 배경 연구도 없이 자행된 졸업정원제로 대학의 정원을 급격하게 늘려놓은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장밋빛 미래’를 외쳐 봐도 지금의 추세를 역전시킬 계기를 찾지 못한다면 미래 역시 지금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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