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가 제법 분주하다. 어느 해라고 안 그랬을까만 그래도 올해가 유난하게 느껴진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어려운 경제가 먼저 짚인다. 탁탁한 살림살이가 매해 같은 시작이라도 더욱 마음을 허둥대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걸게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대하거나 처음 눈인사를 나누는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수강생들에게 면학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어쩔 수 없이 취업난을 언급해야 하는 교수들의 얼굴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얼마 전부터인가, 학과마다 졸업식이 따로 열리고 있다. 다른 학교를 가보니 그 학교에서도 학과 단위로 졸업식이 열린다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제 이런 졸업식은 대학가의 보편적인 풍경이 된 것일까.   한 때 대학 졸업식은 온가족과 친척이 모두 출동해야 했던 집안 행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에는 대학교육이 그 집안을 대표하는 일부에게만 허용된 특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준화가 되면서 대학교육의 허용 폭이 넓어진 5공 시대가 되어서는 참석한 졸업생들이 단상의 반대로 돌아앉아 기성구조에 대한 반항을 표시했던 정치적 자리가 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무도 참석을 안 해 일부 상을 받는 학생과 본부의 보직자만 형식적으로 치러야 했던 허울의 행사로 전락하기도 했다. 졸업식 날 일반 졸업생이 했던 유일한 행사는 그저 가운 입고 사진 찍는 일이었다.


  최근에는 이렇게 학과가 자율적으로 졸업식을 열면서 모든 졸업생들이 주인공이 되고, 교수와 재학생들까지 열심히 참석하는 즐겁고도 의의가 큰 행사가 되고 있다. 이번 졸업식은 사상 최악으로 낮은 취업률이란 악조건 때문에 새 출발의 희망이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졸업생들은 정든 캠퍼스를 떠나는 서운함과 그 캠퍼스에서 부모님이나 가족들과 나눈 교감, 교수와 후배들의 진심어린 축하로 졸업의 기분만큼은 충분히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젖어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를 돌아본 졸업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는 홈커밍데이나 여러 다른 일로도 올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입학과 졸업에서 학교가 주는 특별한 느낌은 오래도록 그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사회의 ‘현장’에서는 대학의 공부가 그들의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대학을 비판 하지만, 사실 그 공부가 같다면 대학이 무슨 필요가 있을지 의심된다. 만약 대학에서 정말 단기-실용적으로는 아무런 쓰임이 없는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회적 정의를 향한 용솟음치는 공분, 창조적 파괴의 열망, 자기보다 못하고 사회에서도 버려진 수많은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봉사의 마음가짐이 없다면, 대학이 대학일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때가 온다면 우리는 뼈저리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부산의 3월 날씨가 다른 달에 비해 별로 좋지는 않지만 어제는 악천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날씨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없으므로 내일은 또 언제 찌푸렸냐는 양 좋아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살기가 더 어려워지더라도 반드시 지키면서 그 잠재력을 키워야 하는 부분은 늘 있는 법이다. 최종 교육기관인 대학이 취업 때문에 몸살을 앓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와중에서 자유-상상력-열정-공분-봉사 같은 미덕이 손상 받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나중에는 반드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불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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