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에 우리를 더욱 춥게 만든 건 구제역과 살처분이었다. 소, 돼지 등 가축들이 연이어 병에 걸리고, 남은 가축들을 위해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현실이 96년 만에 찾아온 추위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봄은 되었지만 아직 이렇게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가축들의 멍한 눈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해서다. 이 정부가 많은 실정을 거듭했지만 구제역 파동은 아마도 두고두고 남을 또 하나의 오점이 될 것 같다.


올 겨울의 다른 한 켠에서는 국립대 교수들의 월급을 ‘성과급화’하는 명령이 통과되었다. 성과급이라는 말 그대로 성과에 따라 월급을 차등화 하는 것인데, ‘성과≒(금전적)보상’이라는 단순한 외견과 달리 ‘성과를 재는 방법’, ‘성과에 투입되는 급료의 비중’, ‘성과가 적용되는 기간’, ‘성과가 평가되는 학문간 차이’ 등에 따라 수많은 이견과 갈등을 낳을 수 있다. 물론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연구ㆍ교육자의 성과가 과연 무엇이냐”라는 성과의 의미를 따지는 일 또한 도외시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증명하듯 대학가에서는 작년과 올해 자주 성과급이 도마 위에 오르고, 심심치 않게 갈등 또한 보고된다. 단골로 오르는 주제는 ‘성과’의 정체와 최근 나타나는 질과 양의 반비례 경향성의 관계 문제다. 성과를 강조하면서 양은 크게 늘어났지만, 이를 뒷받침해야 하는 질은 여전히 답보에 있거나 오히려 줄어들어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질과 양이 전혀 관계가 없을 수는 없지만, 이 둘이 정비례의 관계에 있기는 매우 어려우며 때로 반비례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정책은 양을 위해 질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높고, 학문에서 ‘질이 없는 양’이란 게 과연 뭘 의미하는지가 새삼 궁금해진다. 아마도 선의로 본다면, 질과 양이 균형을 이루면서 전체적인 학문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목표일 터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불균형이 심하다면 이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 흔히 보도되는 국가별 논문 수는 호사가들의 입만 즐겁게 할 뿐 정작 학문 능력과는 관계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조금의 관계밖에 없다.


물론 ‘일하지 않는 자’가 ‘일하는 자’와 똑 같이 ‘먹는다’면 그도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만약 당사자들이 차등에 동의한다면, 차등이 꼭 그렇게 부작용만 가지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성을 인정해도 막상 성과를 평가하려 하면 문제는 허다하게 나온다. 교수들의 일은 주로 연구와 교육인데, 이상하게도 성과는 연구만 부각시킨다. 교육의 비중도 낮지 않지만, 교육은 성격상 정교한 양적 지표를 개발하기 어려운 탓이다. 만약 성과를 강조하는 일이 교육의 공동화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면 이 역시 대가가 너무 크다. 좀 더 기술적인 문제도 있다. 논문 쓰는 방식이나 관행, 방법론이 학문마다 차이가 있는데, 만약 이를 같은 잣대로 평가한다면 이 역시 합리를 가장한 불합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통과된 교육부식 성과급은 방식이 너무 가혹하다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이 성과급은 누적적으로 적용되면서 퇴임 후까지 연장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 대학들은 이러한 성과급의 문제를 충분히 경험했다. 물론 전혀 장점이 없지는 않았다. (양적)경쟁에는 어두움도 있지만 밝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몰라라 하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단점 또한 너무 크다. 지난 경험을 거울삼아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평가방식에 대학인들이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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