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80~90년대까지 대학은 지성인의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현재에도 과연 대학이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은 그리 명쾌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성인이란 무엇일까? 지성인이란 새로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맹목적이거나 본능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 지적인 사고에 근거해 그 상황에 적응하고 과제를 해결하는 자를 의미한다. 인류분류학에서는 현생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며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결국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은 왜 지성을 대표하는 상징이었는가를 생각해보자. 학문, 사고, 고민, 갈등, 아픔 등 수많은 지식과 경험들은 인간이 지적인 사고, 판단을 하는 바탕이 된다. 학문을 통한 지식이 지성을 이끄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학문적 지식을 통해 인간들은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정신적 능력을 기르게 된다. 대학은 사회의 새로운 인식을 낳는 정신적 능력을 가진 지성인들로 이뤄지고 그러한 지성인을 만드는 곳이다.


  과거, 사회와 정부에 대한 비판과 가야할 방향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제시한 이들이 대학생과 교수였다. 개인적 이익보다는 범사회적 사안을 고민하고 토론하며 사회가 갈 방향을 제시했던 곳이 대학이었기에 대학은 지성인의 상징이었다. 그럼 현대의 대학은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식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성인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현 대학인들에게는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과 너무도 멀게 느껴질 뿐이다.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자라와 지금은 미래의 직장을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대학생들. 실적 중심으로 동료 교수들과의 경쟁 속으로 내몰리며 어느덧 소통, 학생들의 교육, 사회에 대한 고민을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되어버린 교수들. 연구비, 산업체와 관련된 분야만을 중시하며 철학, 인문학, 기초과학을 변두리 학문으로 취급하고 있는 대학과 사회.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학이 지성인의 집단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대학이 지성의 상징이 아닌 직업 교육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학이 지성을 대표하는 상징일 필요가 더 이상 없는 것인가?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인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곧 사회의 중심이 될 젊은이들과 우리 자식들의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다. 어느 누구도 혼자만 행복해질 수 없고 사회가 행복해져야 개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는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한 방식은 교육, 생활, 삶 등 사회의 전반에 적용됐으며 마침내 우리는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이제 우리의 경제적 삶을 윤택하게 해 준 이 고마운 방식에 대해 되짚어 봐야할 때다. 선진국의 전철을 보며 쾌속 주행만을 하면 됐던 방식을 다른 선진국들과의 같은 대열에 있는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동안 달려만 오면서 잃어 버렸던 인간의 가치, 소통의 소중함을 생각해야 한다. 대학이 사회의 시대적 통념을 고민하고 새로운 인식을 낳는 지성인의 기능을 해야 우리 자손들이 정신적 윤택함을 함께 가질 수 있는 미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경쟁과 실적 중심으로만 내몰고 있는 지금의 대학은 결코 그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걱정스럽고 애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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