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를 보면 경기가 거의 끝나갈 때 어느 팀이 큰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으면 도루를 시도한다거나 점수를 더 얻기 위해 무리하게 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 간에 혹은 감독 간에 동업자 정신에 기초한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래서 만일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개인 기록을 높이기 위해 도루를 시도한다거나 한 점이라도 더 얻기 위해 무리하게 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동업자 정신을 위반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어서 오늘은 운이 좋아 크게 이기고 있지만 내일은 크게 패할 수도 있다. 승리만을 위한 스포츠는 팬들이 외면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구단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고, 결국 그 손해는 선수들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스포츠에서 동업자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스포츠의 목적은 승부에서 이기는 데 있기보다는 스포츠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업자 정신은 스포츠 경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 모든 곳에 존재한다. 비록 계급사회이긴 했지만 중세 봉건시대에도 영주와 농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동업자 정신이 있었다. 봉건제도 하에서는 오늘날의 극빈층으로 볼 수 있는 농노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배계급인 영주로부터 노령이나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었다. 당시의 농노들은 그들에 대한 사법권까지 소유했던 영주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거주이전의 자유는 없었지만 식구들의 기초 욕구는 충족될 정도로 그들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중세 봉건시대에서는 '보호받지 않는 빈곤은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얘기도 있다. 넓게 보면 이것은 일종의 영주와 농노들 간의 동업자 정신으로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성공한 기업가들은 같은 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경쟁사, 고객, 투자자 등 큰 의미의 동업자들과 같이 호흡을 하며 기업을 경영한다. 기업과 소비자도 동업자이다.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소비자가 사 주지 않으면 그 기업은 망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업자이다.

   
  요즘 와서 느끼는 것은 대학에서 동업자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취득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른 학생들과의 교류 빈도는 점점 적어지고, 교수들은 성과에 따라 연봉이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다른 교수들을 동업자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자로만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업자 정신이 사라진 승리만을 위한 야구 경기가 재미가 없어 팬들이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사회는 삭막할 뿐만 아니라 발전마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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