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전태일 평전
  '전태일 평전’은 출간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초판 출간 당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엮은이로 하여 책의 저자마저 숨겨야했다. 당시 문공부로부터 ‘판매금지’ 조치에 출판기념회를 경찰들이 봉쇄하는 등 당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출판돼 재야 운동권 학생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원래 저자가 민주화 투사였던 조영래 변호사임을 밝히고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내용을 교정하여 다시 발간한 책이 내가 읽었던 ‘전태일 평전’의 판본이었다.

  전태일, 그는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초등학교도 중퇴하고 동생과 함께 신문팔이, 구두닦이를 하며 힘들게 생활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배운 봉재기술 덕에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삶은 고뇌로 가득 차게 된다. 시다(잔심부름 하는 사람)부터 미싱공, 재단사까지 거치면서 그는 평화시장에서 고생하는 자신의 여동생 또래의 혹은 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일당 70원에 끼니도 때우지 못하고 고된 노역에 시달리며 폐병에 위염, 기관지염 등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는 늘 마음아파 했다. 1원짜리 풀빵을 사서 여공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작 자신은 차비가 없어서 집까지 걸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작업장에서 움직일 때는 허리를 굽히고 기다시피 해야 했다. 더구나 창문이 없어 퇴근시간이 되면 온몸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4시간 노동을 하는 그들을 위해서 전태일은 자신의 인생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이 와중에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후 혼자 법전을 공부하며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감독관에게 항의하고, 기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등 수 많은 노력을 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경, 서울 평화시장 앞 길가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울부짖으며 22살의 생을 마감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힘들게 재단사의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보회’를 조직하여 근로기준법을 알리고 당시 여공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었다. “어려운 법조문을 가르쳐줄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그였다.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기까지 그의 고뇌는 어떠했을까? 평생을 판자촌에서 살아온 그에게 힘들게 고생하는 어머니가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그의 외침은 당시 평화 시장의 어린 여공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근로자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이 정부의 억압과 기득권층의 방해 속에 좌절된 이후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현실에 청년들이 분노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부조리, 폐습 속에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선뜻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라고 믿는 것을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는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용기내어 ‘옳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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