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수업시간에 종종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정의”를 영어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 학생들의 대답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 쪽은 “justice”이고, 다른 쪽은 “definition”이다. 십중팔구 전자는 문과생이고, 후자는 이과생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번 수업을 듣고 난 후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definition일 수도 있고 justice일 수도 있다”고 대답하라고 …

  우리 사회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와 이과를 확연하게 분리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진리인 양 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문과와 이과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필자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적잖이 당황했다. 문과와 이과의 분리가 보편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특수한 유산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고 한 쪽에만 매진하도록 한 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을 추격하는 단계에서는 적절한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총력전에는 한계가 있으니 국지전이라도 잘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과 같이 우리나라가 추격을 넘어 창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과거의 전략이 효과적이지 않다. 사실상 창의적인 아이디어라 하는 것도 다른 분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학문 사이의 경계를 허물자는 것이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융합(fusion)이나 통섭(consilience)과 같은 용어는 모두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회생물학자인 윌슨(Edward O. Wilson)은 21세기 대학개혁의 목적이 이공계와 인문사회계를 통섭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지금의 대학생들이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 관계가 인류의 복지에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필자가 대학의 세부적인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나치게 좁은 학과의 경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한 때 유행했던 학부제의 폐해가 거론되면서 기존 학과로의 회귀가 더욱 강화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통섭은 아직 시기상조이고 하나의 전공이라도 잘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21세기의 주역이 될 사람들이다. 21세기 인재의 유형으로는 I자형 인간 대신에 T자형 인간이나 H자형 인간이 거론된다. 이전에는 한 가지 전공만 깊게 파면 살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전공을 바탕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뻗어나가거나 이공계 전공자와 인문사회계 전공자가 서로에게 팔을 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선결조건이 다양한 학문에 대한 학습과 이해에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교과과정을 미래지향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전공과목 중에는 비슷비슷한 것이 제법 있다. 전공과목은 그 숫자를 줄이더라도 관리를 강화하여 A학과 졸업생이라면 해당 분야에 대한 튼튼한 지식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이 다른 분야나 새로운 영역을 심도 있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되도록 많이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현실로 자리 잡을 때 우리 사회는 주어진 문제를 풀이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경로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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