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는 일반적인 의미로 접근하기 어려운 몇 겹의 억압이 중첩되어 있다. 가령, 지역 내부에서 질곡 상태에 놓인 지역 여성, 지역 장애인, 지역 내부로 이입되고 있는 이주민과 같이 지역 내부의 하위주체들에게 가해진 억압의 강도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심하다. 그런 만큼 지역은 중심주의의 전횡을 좀 더 예민하게 성찰할 수 있고, 그와는 다른 삶을 모색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소외된 자들의 연대’라는 가치를 증진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부산에서 나온 작품 중에서 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보고 싶은 시가 있다.

  용두산 몇 바퀴 돌고 내려오던 길/ 태풍에 쓰러진 은행나무 잘라낸 밑둥치/ 가운데 텅 빈 구멍이 얼마나 아늑했기에/ 제 발로 들어갔는지? 끌려갔는지?/ 의문투성이 가랑잎 이불 덮은 채/ 동백 씨 하나와 은행 알 하나 잠들었으니/ 어느새 움트고 싹이 자라 잎 활짝 폈네/ 윤기 반들거리는 은행잎과 동백잎/ 동질의 은행이 친자라면/ 이질의 동백은 입양아일까/ 그까짓 친자확인 무엇에 쓰랴/ 보라, 사이좋게 나란히 햇볕 쬐는 저 무죄를! - 이상개, ?입양? 전문, ??부산시인??, 2008년 봄호, 24쪽.

  시인은 용두산 공원 어귀를 산책하다가 태풍에 쓰러진 은행나무 밑둥치에서 은행잎과 동백잎이 동거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친자와 입양아’라는 단어에서 암시되듯이, 위 시의 초점은 나무보다는 사람에 있다. 그것도 용두산 인근의 사람살이에 있다.

  은행잎과 동백잎이라는 이질성의 동거는 이 시대 한국사회에 일반화되어가고 있는 이주인들과의 더불어 살아가기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구절로 읽힌다. 즉 다른 문화를 가진 국외 이주인들과 국내인이 동일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로 읽힌다. 여기서 시인은 그러한 동거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기 위해, ‘동질과 이질’, ‘친자와 입양아’를 따지지 말자고 말한다. 얼핏 보면 이 시는 국내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주민과 더불어 살기 위해 ‘편견에서 벗어나자’는 정도의 소박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 같다. 그러나 시 전반부에는 이보다 더 강력하면서도 경청해봐야 할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시 전반부에 국내인의 보조관념으로 제시된 은행나무를 주목해보자. 은행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밑둥치만 남았고 그 속에 텅 빈 구멍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각각 신산스러운 삶과 그 삶 속에서 형성된 포용력을 의미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외부를 수용하는 자세, 외부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를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고통의 연대감을 키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 시는 사람들이 자기 삶의 고통을 상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거기에 얹혀 생각할 수 있을 때, 타인의 고통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을, 하여 저 나무처럼 “사이좋게 나란히 햇볕 쬐”면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일이 용두산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하는데, 이는 그러한 동거를 이 지역의 역사와 결합시키는 대목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은행나무는 지역에서의 고통어린 삶을, 동백잎은 그 지역을 찾은 이주민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비약한다. 잘 알다시피 용두산 일대는 개항 이후 일본거류민들의 거주지였으며, 식민지 시기에는 민족이산의 통로인 동시에 도일 노동자들의 집결지이자 임시 거주지였고, 한국 전쟁 당시에는 피난민들의 피난처였다. 외부의 이질성이 흡입되고 뒤섞이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는 갈등과 반목도 심각했을 것이지만, 이러한 접촉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이 공생하고 소통하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부산은 결국 이를 특유의 활력과 역동성으로 수용해왔다.

  이렇게 이 시는 이 지역의 역사적 지층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에 포개어 수용해가는 ‘고통의 연대감’을 키워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지역에서의 소외를 연대의 가치로 바꾸어 사유하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하는 점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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