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부산진구에 있는 옛 미군 캠프 하얄리아(이하, 하얄리아) 안으로 들어오니까, 여름 더위가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캠프 밖의 시끄러운 소리도, 빠르게 움직이는 속도감도 사라진다. 갑자기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대를 만난 듯하다. 너무나 조용하다. 빈방에 들어가면 밖의 모든 것과는 단절된 절대공간 안에 온 것처럼 말이다. 땅이든 뭐든 외부에서 그냥 보는 것하고 내부에서 그것들과 소통하면서 만나는 것하고 확실히 다르다. 밖에서 도시를 보는 것과 안에서 도시를 만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외부에서 자연을 그냥 보는 것과 내부에서 그것을 만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정말 하얄리아 안은 텅 비어있다. 갑자기 밖의 복잡함이 일시에 사라져버린다. 라운드테이블(2010년 8월 31일, 14:00~18:00, 하얄리야, 옛 마권판매소에서 하얄리아공원 실시설계보완을 위해 열림, 전문가, 시민단체장, 시의회 의원, 공무원 등 31명이 참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도시로부터 온 이방인들 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비움’보다는 ‘채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간직되어야만 할 부분인 ‘비움’조차도 자꾸 채우려한다. 끊임없이 이방인들은 주위를 자기 것으로 채워나간다. 결국 채움이 이 도시를 지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는 온통 채워지고 결국에는 막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도로가 막히고, 자동차가 막히고, 숨통이 막히고, 도시는 온통 막힘으로 가득 차 있다. 氣가 뚫리지 않는 사람이나 도시는 결국 죽음이다. 채움의 결과는 인류의 사멸인 것이다. 시인 김기택은 ‘우리나라 전동차의 놀라운 적재효율’에서 우리나라 도시는 빈틈없이 온통 막힘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전동차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빈틈마다 발 하나라도 더 집어넣기 위해/ 밀고 밀리고 비비틀고 움츠린 끝에/ 사람들은 모두 사각기둥이 되어 있다./ 승객들을 벽돌처럼 맞추어 빈틈을 없애버린/ 놀라워라, 전동차의 저 완벽한 적재효율!/ 전동차가 급정거하자 앞쪽으로 사람들이 기운다./ 사각기둥은 일제히 흐트러지며 찌그러지고/ 그동안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던 비명들이/ 찌그러진 사각기둥에서 일제히 터져나온다.//

 

영자야엄마나여기있

어밑에아기가깔렸어

요숨막혀내핸드백내

구두나좀내리게그만

밀어어딜만져이짐승

쌍년아야귀찢어져손

가락에귀걸이걸렸어

어딜자꾸만주물러소

새끼침튀겨개년말새

 

 

 

  드디어 전동차 문이 폭발하듯 열리고/ 파편처럼 승객들이 퉁겨나간다./ 승객들이 미처 다 밀려나가기도 전에/ 한떼의 사람들이 또 밀려들어온다./ 빈틈, 퉁겨져나간 사람들 뒤에 생긴 저 좁디좁은 빈틈을 향하여/ 머리와 팔다리와 구두들이 밀려온다./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벽도 온몸으로 부딪쳐 밀면/ 발자국 하나 디딜 공간이 나온다는 것을/…/ 몸 비틀 때마다 벌어지던 빈틈도 모조리 메워버린다./빠르고 정확하다, 우리나라 승객들의 자동화된 순발력’

 

  우리나라 도시는 막힘의 정도를 넘어 거의 꽉 막힘의 수준에까지 도달했음을 시인은 읊고 있다. 이는 전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막힘의 정도가 극한점을 향하여 치닫고 있음을 시인은 보여주려 하고 있다.

 

  빈 공간만 있으면 무엇으로 채우려하는 욕망이 이글거린다. 고층아파트로, 초고층빌딩으로 한결같이 차곡 차곡 채워나간다. 마치 우리나라 전체가 전동차의 승객들처럼 ‘자동화된 순발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버스도, 땅도, 해수욕장도 모조리 자동화된 순발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것만 믿고 있다가는 너나할 것 없이 숨이 막혀 죽게 될 것이다. 한계를 모르므로. 더 시간이 지체되기 전에 시인 김지하의 ‘無’에서처럼 '공허하므로 움직인다// 시장해서/나/너를 사랑했노라’/…‘ 라고 자세를 전향할 때이다. ’자동화 된 순발력‘은 더 이상 유효기간이 지났다. 배고픔은 자동화 된 순발력도 먹어치울 것이다. 시장하자, 그리고 나, 캠프 하얄리아를 사랑했노라라고 외치자!

 

  캠프 하얄리아는 100년 전 부산경마장에서 시작하여 조선청년 3,223명의 뼈아픈 상처가 깃들어 있는 임시군사훈련소, 그리고 다시 미군부대가 주둔하게 되는 역사와 기억이 스며있는 장소다. 또한 그 구역에서도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이젠 더 이상 자동화된 순발력을 믿지 말자. 한계상황으로 왔기 때문이다. 하얄리아공원의 개념설정부터 없애주자. 세계도시 부산을 향한 공원, 미래를 향한 공원, 모두를 위한 공원, 문화가 있는 공원, 도심 재생성을 촉진하는 공원 따위의 하얄리아에 짐이 되는 공허한 말장난은 그만두자. 하얄리아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랜 기간 동안 외세득세의 역사와 기억 속에 있는 것만 해도 적재효율을 넘어서는데, 다시 말하면 자동화 순발력은 거의 상실하고 복원력을 상실한 무력증에 빠져 있는데 디자인 콘셉트로 얼루비움(비옥한 새 기운이 흐르고 쌓이는 21세기 부산의 새로운 도시공원), 공간 콘셉트로 흐름, 연결, 쌓임 등으로 정했다하니 氣가 찰 노릇이다. 종합계획도를 보면 온통 길 판이다. 진입광장, 수변보행 공간, 역사문화관, 친수공간, 기억의 벽, 역사의 길, 기념정원, 조각공원, 다목적 잔디광장, 미디어테크, 비지팅센터, 문화마당, 양생초화 숲, 운동시설/어린이놀이터, 조화류전시사면, 날씨정원, 주민참여정원, 대형주차공간 등 너무나 많은 것을 갖다 붙인다. 이러한 것들이 하얄리아에 대해 얼마나 고통일까?

 

  자동화된 순발력도 이제 극한점에 다가가고 있다. 하얄리아는 너무나 많은 적재를 하였다. 여기에다 심각히 오염된 기름까지 등에 지고 있다. 이 땅이 아무리 ‘놀라운 적재효율’을 지니고 있다 손치더라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우리가 욕망자체에 대해 공복감을 느끼는 탈욕망(비움)상태에 도달할 때 콘셉트로 가득 찬 기존 하얄리아의 마스터플랜을 버릴 것이며 진정한 공복감이 찾아 올 것이다. 공허하므로 살아 움직인다.

 

  부산시든 시민이든 일방적으로 그 땅을 개발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본 것처럼 땅 자체가 한계를 벗어나 극한까지 가고 있는 시점에서 또 다시 공원이란 이름의 적재하중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땅을 신을 모시듯이 하여 그것에 종속되어서도 아니 된다. 땅의 진정한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전동차가 출발한 다음에도 비명과 신음이/찌그러진 사각기둥마다 새어나오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정사각기둥을 되찾아가고‘ 외부에서 보면 비명과 신음이 새어나오지만 빠르게 정사각기둥을 되찾아 감으로써 우리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사물을 밖에서 보는 데만 익숙해 왔다. 사물의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 위해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얄리아를 이젠 놓아주자. 그 ‘놈’이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유예시키자. 100여년 징발되어 극한점에 도달한 ‘놈’을 쉬게 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가 아닌가? 군에 갔다 온 ‘놈’도 몇 달은 쉬게 하지 않는가? 아무튼 하얄리아를 푹 쉬게 한다. 그 후 조금씩, 단계별로, 우연성에 대처할 수 있는 시민참여형으로 하얄리아를 삶과 밀착 된 강력한 장소로 재활성화 시킨다. 그랜드~이니, 마스터~이니 하는 거대한 말을 쓰지 말자. 이참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옛 경구를 다시 생각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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