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은 모두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전국을 휘몰아친 강추위와 강원도 일원의 폭설, 아직 현재 진행형인 구제역 파동, 경제불안과 전세대란, 긴장일로의 남북관계 등 주변에는 온통 힘겨운 일들이 사람들의 어깨를 눌렀다.


  그나마 겨우내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던 캠퍼스가 다시 돌아온 학생들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의실을 기웃거리는 새내기들로 붐비는 것을 보며 비로소 평온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새내기들을 보며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들은 우선 밝고 발랄해서 좋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선진국 드라이브에 들어선 이후 태어나 자란 세대답게 구김살이 없다. 하나같이 똑똑하고 개성이 넘친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다소 가벼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지킬 것은 지킬 줄 안다. 누릴 것은 누리고, 또 베풀 것은 베풀 줄도 안다.


  예전엔 그렇지 못했다. ‘봄’은 그저 꽃피는 계절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 90년대 초까지도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개강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의 반복을 의미했다. 4년 내내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정문을 드나들었고 진리는 강의실이 아닌 거리에 있다고 믿었다. 학교 앞 시장통에서 어쩌다 자장면 한 그릇을 먹을라치면 마치 과분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아 죄스러워 했다. 한 번도 남의 것을 욕심내거나 빼앗은 적이 없음에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생 신분을 가진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타협하고 설득하기보다는 꺾이지 않으려는 오기와 자존심이 앞섰고, 개성은 구호 속에 묻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전직 건설회사 CEO가 국정의 책임자가 되고 경제학자 출신인 교육부 장관에 의해 기초학문과 보호학문의 전당이라 믿었던 국립대학이 독립 법인으로 전환될 운명에 처해 있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안면몰수’쯤 대수롭지 않다. ‘퇴출’, ‘구조조정’과 같은 기업 용어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되면서, 이윤추구와는 무관한 공공조직도 이제는 기업을 따라 배우고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해 대학을 마치 기업처럼 ‘경영’한다.


  이렇게 기업경영의 원리들이 사회 전반을 파고들면서 교육과 복지 같은 공공부문은 경쟁력이 낮은 존재, 즉 ‘구조조정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공교육 영역의 격차는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 않고는 40조원에 이르는 거대 사교육 시장의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선생님이 아닌 학원 강사로부터 진학상담부터 개인적인 상담까지 받는다. 아이들은 말한다. “학원선생님이 훨씬 더 잘 가르친다”고...


  그들이 오늘 대학생이 되었다. 지난 12년 아니 어쩌면 더 긴 세월을 오로지 ‘경쟁’ 속에서만 살아온 젊은이들이다. 그들에게 과연 대학은 어떠한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강사와의 소통에 익숙하던 그들에게 ‘교수’는 과연 어떻게 자리매김될까? 학점과 스펙에 목말라 있는 그들에게 그래도 이기적이지는 않았던 선배들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넘어지지 않으려면 앞만 보며 뛰지 말고 가끔 고개를 숙여 땅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그 봄과는 무늬조차 같지 않은 오늘의 봄을 맞으며, 괜히 낯설고 막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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