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과 생계 힘겹게 병행
-일반인보다 3~5배 일해
-의젓한 효자·효녀 미화로
-사회적 제도 시스템 미비

작년 5월, 뇌출혈을 앓는 친부를 홀로 1년 가까이 간병해 온 22세 청년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간병살인’이 발생했다. 아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에게 8일간 의도적으로 치료식과 물, 처방약 등을 주지 않았고, 아버지는 영양실조 상태에서 폐렴 등이 발병해 숨졌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적인 사건이었기에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본 사건을 취재한 탐사보도 전문 매체 ‘셜록’에 따르면, 아버지가 쓰러져 평생 누워 지내게 됐지만 돌볼 사람은 갓 성인이 된 청년밖에 없었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갔고, 삼촌은 퇴직금까지 당겨 받아 병원비를 내다가 가정의 불화가 생겨 도움을 줄 수 없게 됐다. 결국 청년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병원비 등을 벌었지만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월세가 밀리고 휴대폰과 도시가스도 끊길 만큼 생계가 어려워지자 지인들에게 ‘10만 원만 빌려 달라’, ‘쌀이라도 살 수 있게 2만 원만이라도 빌려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년’ 하면 꿈, 열정, 청춘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아픈 가족을 돌보며 생활고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느라 꿈꾸기 힘들거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청년들도 있다. 어린 나이에 가족 부양의 책임을 떠안게 된 ‘영케어러’(가족돌봄청년·young carer)다. 영케어러는 장애나 질병, 약물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청년 가장을 말한다.

영케어러(가족 돌봄 청년) (c)한지윤 디자이너
영케어러(가족 돌봄 청년) (c)한지윤 디자이너

영케어러들은 힘겹게 공부와 생업을 병행해 나가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서울연구원이 개최한 ‘2022년 작은연구 지원사업 결과발표회’에 따르면, 영케어러는 생계비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반 성인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이나 아르바이트에 할애해야 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일·아르바이트에 투자하는 평균 시간은 성인 약 3.3시간, 대학생은 약 1시간 이상이다. 반면 영케어러들은 매일 적어도 7시간, 많게는 12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3~5배 더 많은 시간을 일에 쏟고 있는 것이다.

서울연구원의 질적 사례연구에 응한 A 씨(22세, 여, 서울시)는 편찮으신 할머니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홀로 식당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병원비를 벌어야 해 학교를 그만두기 직전이라고 했다. A 씨는 “알바하는 시간을 줄여서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환경 자체가) 취업에 불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출처: 서울연구원 '2022년 작은연구 지원사업 결과발표회' 갈무리]
[출처: 서울연구원 '2022년 작은연구 지원사업 결과발표회' 갈무리]

관련 연구에 따르면, 영케어러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고령화로 인해 부양 대상이 조부모까지 확대되고 있다. 저출산 및 한부모 가정 증가로 형제자매의 도움 없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원익(사회복지학) 교수는 “저출산이나 핵가족화 등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청년들이 갑자기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정부도 모르는 영케어러 규모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영케어러를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매우 부실하다. 2022년 발표된 스위스의 한 논문(Leu, Agnes et al., “The 2021 cross-national and comparative classification of in-country awareness and policy responses of ‘young carers’”)을 보면, 영케어러에 대한 인식과 정책적 대응 수준을 기준으로 국가들을 1~7단계로 분류했을 때 우리나라는 가장 낮은 단계인 ‘무반응 국가’ 그룹에 속한다. 1단계(통합적·지속 가능 정책이 완비된 국가)에 해당하는 국가는 없으며, 영국이 2단계(선진수준)로, 호주, 캐나다 등이 3단계로 분류됐다. 영국은 △아동 및 가족법 2014 △국가보건사회서비스 △돌봄법 등 다양한 법률에서 영케어러의 개념과 범위를 정의하고, 영케어러에 대한 지방 정부의 의무를 규정하며 제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호주는 △사회적 고립감 △경제적 곤란 △서비스 수혜 비율 등의 종목에서 영케어러와 일반인을 비교 조사한다. 이 국가들은 모두 △전국 영케어러 인구수 △연령별 분포 △구체적인 돌봄 대상 등 구체적인 현황을 조사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영케어러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영케어러 인구수는 대략 18만 4,000~29만 5,000명가량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타 국가들을 대상으로 집계된 국가별 평균 영케어러 인구 비율(5~8%)을 우리나라 청소년 인구(11~19세)에 단순 대입하여 산출된 값일 뿐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이루어진 유의미한 연구 성과도 없다. 

부산도 마찬가지다. 서울연구원은 ‘작은 연구 지원 사업’으로 서울시 내에서 영케어러 조사를 실시했지만 부산연구원은 조사한 적이 없다. 부산연구원 측은 “관련해서 조사나 연구가 된 건 없다"며 "추후 영케어러 관련 연구 계획도 아직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영케어러에 주목한 건 지난 4월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4월 1일부터 약 한 달간 전국 중・고등학생과 만 13~34세 청소년・청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전국의 영케어러 규모와 현황을 조사했다.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총괄과 박진웅 행정사무관은 “설문조사 응답자 중 일부를 대상으로 현재 행정조사와 심층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11월 말까지 결과 분석을 하고, 12월 초에 계획된 포럼에서 전체적인 분석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경제적 지원+돌봄 서비스’ 절실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우리나라의 현실 이면에는 오랜 시간 숭상되어 온 ‘효(孝)’ 사상이 있다. 그간 영케어러는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을 돌보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효자·효녀로 미화돼 왔다. 법적 차원에서 복지 대상자로 접근하기보다는 도덕적 차원에서 칭찬 혹은 연민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에 가정에 국한된 문제라는 시각에서 탈피해, 영케어러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교수는 “우리는 심청전 등을 보면서 효를 굉장히 절대적인 가치라고 생각해 왔다”며 “효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 영케어러는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많게는 30대 초반까지 포괄하는 개념인데 이 시기에는 본인의 미래를 준비하고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이런 시기에 가족을 돌보는 데 모든 시간을 쏟고 자기 계발의 기회를 놓친다는 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원익(사회복지학) 교수가 영케어러 현황 설명과 정책 제언을 하고 있다. [지용재 기자]
이원익(사회복지학) 교수가 영케어러 현황 설명과 정책 제언을 하고 있다. [지용재 기자]

전문가들은 영케어러 복지 증진을 위해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인력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언한다. 서울연구원 작은연구 지원사업팀 선미정 연구원은 “생활비, 교육비, 의료비 등 경제적 지원이 일차적으로 필요하고 육체적 돌봄을 보조해 줄 수 있는 돌봄 서비스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 보완(돌봄수당·기초생활수급조건) △학업·취업 지원(학비·진로탐색·면접·자기소개서 첨삭·멘토링·공공근로 인턴·취업 인센티브·창업 지원) △돌봄서비스 지원(간병 서비스·요양보호사·활동지원사 개편·기초돌봄실습방법 헬프라인) △정서적 지원(사회적 교류·찾아가는 서비스 지원 상담·전문 치료) 정책도 제안했다.

영케어러가 소외되지 않고 지역 사회 속에서 어울려 복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지역 사회 통합 돌봄(커뮤니티 케어)’ 방향의 복지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이 교수는 “최근 사회복지계에서는 돌봄 문제와 관련해 커뮤니티 케어가 큰 정책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돌봄의 책임이 가족에게만 전가되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스템과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외 여러 국가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영케어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고, 영케어러가 고립되지 않도록 외부의 다양한 지원 체계를 안내하고 있다. 영국 영케어러는 ‘The Children’s Society’라는 아동 보호 지원 민간단체의 웹사이트를 통해 자기 거주지 근처의 지원기관을 찾아볼 수 있다. 호주는 간병인을 위한 종합 포털 사이트인 ‘Carer Gateway’와 집중 지원 및 서비스 제공 온라인 플랫폼인 ‘Young Carers Network’를 운영해 △자조모임 △상담 △행동요령, 유용한 정보 등에 관한 온라인 교육 △긴급 지원 등을 제공한다. 아일랜드의 경우, 영케어러그룹(young carer groups)을 운영해 영케어러가 서로 유익한 정보를 교환하고 상호 간 지지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도록 함으로써 고립을 방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 모두 영케어러를 신속하게 발굴하고 관련 복지 정책 홍보가 우선돼야 가능하다. 신청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제도에는 어린 영케어러가 접근하기 힘들뿐더러, 수혜 가능한 기존의 복지 제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교수는 “긴급지원복지제도, 장기요양보험 등 다양한 법이 있지만 잘 모르는 분이 많다”며 “돌봄과 함께 자기 발전 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간병 제도를 통해 간병인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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