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전태일(全泰壹)은 17세 때 평화시장의 의류제조 회사의 재단사로 입사하였다. 전태일은 주변 나이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노동에 박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꼈다. 그는 동료 재단사들과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고, 이의 해결을 청와대에 요구했다. 모든 것이 요구대로 개선되지 않자,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도모하였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있으나 형식적이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자, 더욱 비애를 느끼고 죽음을 택하였다. 1970년 11월13일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품고 비참한 노동현실을 알리며 분신으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당시의 정부와 기업에게 무거운 경각심을 주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전태일 평전>의 저자 고 조영래 변호사는 당시 사람들의 분위기를 “사람들은 이제껏 아무도 발음하려고 하지 않던 ‘노동자’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어휘들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전태일을 말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여전히 변하지 않는 노동 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2010년 우리 시대에도 전태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4년제 지방국립대학을 졸업한 ㅂ씨는 공장에서 비정규직 생산노동자로 일한다. 본래 집안사정이 어려워 등록금을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했다. 재학과 휴학을 번갈아 하다보니 남들보다 졸업이 많이 늦어졌다. 입사자체가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상사와의 불화가 깊어져 회사를 나왔다. 그 사이 부모님의 병이 드시고, 집안은 급격하게 기울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디서건 일을 해야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Q. 실제 공장에서의 노동자의 생활은 어떤가요.
A. 이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요. 흔히들 생각하는 평소 상식을 넘어서는 근무 강도로 일을 하죠.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는데, 하청업체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하청업체, 생산의 가장 기초 부품을 제조하는 공장이에요. 일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고돼요. 하청업체끼리의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죠. 경력이 쌓아야만 더 높은 수준의 공장에서 일할 수 있어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고 잔업을 해요. 아홉 시를 훌쩍 넘기는 일도 허다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들 그렇게 일하죠.

Q. 가장 힘든 점은 어떤 건가요
A. 하루에 12시간, 13시간 일하다보면 몸이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까지 피폐해 진다는 것을 느껴요.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일을 하면 쉬어야 하는 데 그게 없어요. 기계처럼 일하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죠. 잔업과 특근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잔업수당이 많은 것도 아닌 데 주말에도 쉬지 못해요. 안그러면 더 이상 일할 수가 없으니깐요. 개인 시간은 없어요. 폐암에 걸리신 ㅂ씨의 아버지를 뵈러 갈 날도 없었죠.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가족도 제대로 만나지 못할 정도로 쉬지 못하고 일해요. 그 밖에 말을 더해서 무엇하나요.

Q. 그렇게 일하는 데 임금은 어느정도 받나요
이렇게 일해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것은 100만원 안팎이에요. 더 안타까운 점은 사람 중심적인 생각이나 철학이 없이 결국 일의 효율적인 결과나, 공장의 이윤적인 부분만을 최우선 하는 방식이에요.
 
Q.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써 생각한 대안이 있다면요?
A. 마땅한 대안은 없어요. 다른 공장도 다 마찬가지인걸요. 하지만 더 나은 조건이라 하더라도 잔업에 특근은 피할 수 없어요. 어차피 우리나라 안에서는 인건비와 재료비는 똑같잖아요. 단가를 낮추려면 더 일을 많이 시킬 수 밖에 없어요.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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